존 웨슬리가 감리교라 불리게 된 이유

옥스퍼드 대학의 신성회
옥스퍼드 대학의 신성회

신성회(Holy Club). 성경 벌레(Bible Moths). 규칙쟁이(Methodists).

이 별명은 찰스와 존 웨슬리와 함께 소그룹을 한 사람들에게, 감리교회는 물론이고 감리교 운동이라고 부르기도 훨씬 이전에 다른 사람들이 붙였던 별명 중 일부에 불과하다. 찰스 웨슬리와 존 웨슬리는 지금의 연합감리교회로 이어진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이 모든 것은 1728년경 찰스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치는 시기에 몇몇 사람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찰스 웨슬리는 항상 학업이나 신앙 성장에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학업 첫해에는 찰스 웨슬리는 카드놀이와 음악, 연극, 춤 등 다양한 오락을 즐겼다. 하지만 졸업반이 되면서 찰스는 공부에 집중하고 신앙이 성장하길 원했다.

찰스는 혼자서는 이 일을 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당시 옥스퍼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소그룹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모였다.

원래 그 소그룹에서 고전 문학에 대해 토론했지만 결국 신앙을 주제로 모이기 시작했다. 교회역사보존위원회의 전 기록 보관 담당자 데일 패터슨에 따르면, 이들은 주중에는 고전 문학을 읽었지만 주말, 특히 주일에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신성(神性) 또는 신학에 관한 작품을 읽었다고 한다.

이런 신학적 대화를 나누면서도 찰스는 계속 신앙에서 고군분투했다. 그는 형 존 웨슬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찰스는 존에게 보낸 편지에서 “형만큼 기꺼이 내게 선의 도구가 되어줄 사람은 없어요””라고 썼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누군가의 기도, 아마도 어머니의 기도 덕분일 거예요. 내가 무기력증에서 깨어난 방법과 이유를 스스로 밝힐 수 없지만, 다만 형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에요.”

존 웨슬리는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국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아버지의 교구를 돕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가 원래 연구 대학원생이었던 옥스퍼드로 돌아왔을 때, 그는 곧 소그룹의 지도자가 되어 소그룹을 조직하는 기술을 가져왔고 초기에 교육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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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도 이 소그룹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이들을 ‘성찬주의자’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성찬식을 자주 거행했기 때문이다. 웨슬리 형제는 적어도 매주 성찬식을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한 달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매주 성찬식은 그들의 모임을 가장 먼저 성장하게 만든 항목 중 하나였다. 매주 성찬식을 행하는 개신교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찬식을 찾아다녀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소그룹을 “열광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들은 일종의 종교적 광신도였을까?

패터슨은 “그건 모욕적인 용어였습니다. 당시 성령이 충만하다고 주장하거나 열정적인 사람들은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졌죠.”라고 말한다. 이 용어는 한 세기 전 잉글랜드 내전 당시 “과격분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웨슬리는 자신을 “합리적인 열광주의자”라고 생각했다고 패터슨은 말한다.

공덕주의자(Supererogation)”는 작지만, 성장하는 이 소그룹에 적용된 또 다른 별명이었다. 공덕주의자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대부분의 신앙인에게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것 이상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는 그들의 열망을 말한다.

웨슬리 형제와 그 동료들은 정기적으로 기도, 금식(일주일에 두 번), 자선 기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방문하는 등의 사역에 일반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대부분은 웨슬리 형제의 아이디어가 아니었지만, 존 웨슬리는 그들의 활동에 문제가 없는지 영국 국교회의 지역 주교에게 확인하곤 했다.

퍼킨스 신학대학원의 교회사 교수인 테드 캠벨은 “이 사람들은 너무 많은 선행을 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캠벨 교수는 공덕주의자라는 별명도 “가톨릭에 대한 은밀한 비난”이었다고 덧붙인다. 당시에는 개신교와 가톨릭 지지자들 사이에 긴장이 남아 있었고 가톨릭의 신앙 관례에 제한이 많이 있었다.

웨슬리 형제가 속해 있던 그룹은 정기적으로 성경 공부에 참여했으며, 당시에는 “성경 나방”이라고 불리었다. 그렇다면 나방이 옷을 먹듯이 이들은 성경을 먹었는가?

그들은 성경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다른 사람들을 책망했기 때문에 ‘성경을 먹는 나방’으로 여겨졌다. 캠벨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늘 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신성회(Holy Club)”라고 불릴 무렵에는 실제로 성장하는 감리교 운동과 관련된 소그룹이 최소 4개 이상 존재했다.

캠벨 교수는 “이 이름들은 모두 그에게 억지로 붙여진 이름이었지만, 존 웨슬리는 그 이름을 스스로에게 맞게 붙이는 습관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결국 최종적으로 붙여진 이름은 “규칙쟁이(methodist)”였다. 존 웨슬리는 처음에는 이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결국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왜 그 이름이 선택되었을까? 캠벨 교수는 “사람들이 (규칙적인 신앙생활을) 볼 수 있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최초 신성회는 웨슬리 형제와 다른 두 사람이 조지아로 선교 여행을 떠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니지만 발전하는 많은 소그룹은 사역을 이어갔다.

웨슬리 형제와 동료들은 영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그들의 방법을 고수했고, 감리교 운동은 영국 전역과 아메리카 대륙, 그리고 이제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오늘날 연합감리교인들은 고백교인 서약에서 “기도, 임재, 은사, 봉사, 증거”를 하겠다고 서약한다. 따라서 연합감리교인들은 웨슬리 형제와 그 동료들이 가져온 활동적인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의 규칙적인 방법은 수년에 걸쳐 발전해 왔지만, 우리는 여전히 더 거룩한 삶을 살려는 존과 찰스 웨슬리의 열망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다.

앤드류 슐라이허는 연합감리교회 공보부에서 일하고 있다. 이메일: mailto:[email protected].

오천의 목사는 한인/아시아인 리더 자료를 담당하고 있는 연합감리교회 정회원 목사이다. [email protected]나 615) 742-5457로  연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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