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클랜드한인연합감리교회가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1905년도로 추정된다. "캘리포니아 네바다 연회 2000년 저널"에 우리 교회의 기원이 1905년도로 기록되어 있다. 믿을만한 구전에 의하자면,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 대지진이 났을 때 피난 온 사람들을 본 교회 마당에 텐트를 쳐놓고 돌보았다고 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캘리포니아 네바다 연회록에 교회 창립 연도가 1905년이라고 기록된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담임목사를 청빙하여 예배를 드리는 교회 모습은 1914년에 이르러서 갖추어 졌다. 당시는 순행 목사인 황사용 목사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다. 1917년에는 예배처소를 조성학의 집으로 옮기면서 태평양 신학교 학생인 임정구 전도사를 교역자로 모셨다. 임정구 목사는 22년 간 오클랜드한인연합감리교회를 섬겼다.
초기 이민 사회 동포들의 삶의 구심점
교회는 시작부터 한인 사회의 중심이 되어, 부유하지 못했던 일세 교민들을 이끈 정신적인 모체가 되었다. 오늘날과 같이 한인 교회가 많지 않았던 당시에 오클랜드한인연합감리교회가 이민 사회와 이민동포의 요람과 같은 역할을 했다. 교회 시작 무렵 있었던 샌프란시스코 지진 때 교회가 피난 온 한인들을 위한 안식처가 된 것부터가 그랬다. 특히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려는 한민족의 소원과 노력을 후원하고 돌보아, 사회에 대한 교회의 빛된 사명을 잘 감당했다.
이무렵 발생했던 스티븐슨 저격 사건은 기억할만하다. 스티븐슨은 일본 정부의 추천으로 대한제국의 정치 고문이 되었던 미국인이었다. 그는 일본 정부의 한국 침략 정책을 지지하였으며, 더 나아가 그는 일본의 정책이야말로 한국민의 복리 증진과 대한제국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극언하는 한편,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 정책을 반대하는 항일주의자들은 단순한 불평분자들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표명해 왔다. 그가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업무 연락차 오는 도중, 1908년 3월 하순 상항에 들려 일본의 한국 병합 정책을 위한 외교 공세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해 3월 23일 오전 9시 30분 상항 페리 터미널기차 정거장에서 장명환, 전명운 두 사람이 기다리다가, 그가 기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총을 발포하였다. 그때, 전씨와 장씨는 서로 공모하지 않았는데, 서로 상대방의 총소리를 듣고 놀랐다고 한다. 스티븐슨은 총알을 팔에 맞았으나 죽지 않았고 전씨와 장씨는 체포되어 잡혀갔다.
얼마 후 이들의 재판을 돕기 위해, 교포들이 성금을 거두어 변호사를 채용했다. 교포들이 모여 회의한 것도 본 교회에서 했다고 한다. 변호사의 말이 전씨와 장씨가 독립 운동가라면 죄가 좀 가벼워진다 해서, 어찌 됐든지 이 두 사람을 살리자면 이들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교포들은 여러 차례 모여 구수 회의를 하고 교회에 모여 기도했다. 교포들은 돈을 거두기 위해 백방 노력했다. 성금을 마련하기 위해 금요일에 금식하는 사람, 고기 안 먹는 가정, 담배 끊는 가정도 있었다고 한다. 전씨와 장씨는 사형은 면했으나 중죄를 선고받고 여러 해를 감옥에서 옥살이 했다.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대학(Stanford University)에 다니던 학생들이 전시 징집 혹은 자원 입대하여 전쟁에 나갔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참가한 전쟁 소식을 알기 위해 교회에 와서 서로 소식을 나누며 기도했다. 피터 할(Peter Hal)은 의과대학교 학생이었는데 미 육군 항공대 소속 조종사로 전쟁에 갔다가, 독일군의 포격을 받아 이태리의 동부 조그만 섬에 추락했다고 한다. 매년 그를 위해 현충일 (Memorial Day)에 교회에서 추모 예배를 보았다.
교인들은 애국심과 신앙심을 병행하여 가지고 있었다. 1926년에 순종 황제께서 승하하실 때 교회 안에서 교포들이 추도 예배를 보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교포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교회의 공동체 의식은 매우 강하여 너와 내가 아닌 우리로서 교회는 존재했다.
평신도 지도력 강화
1940년대로 들어서면서 본 교회는 위기를 맞는다. 임정구 목사 이후로 담임목사가 자주 교체되는 어려움을 겪는다. 당시 교역자는 100마일 동쪽의 새크라멘토 지역까지 돌보아야 하는 부담이 안겨져 있었다. 당시 본 교회 교인의 상당수가 오클랜드에서 동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새크라멘토 지역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데에는, 평신도들의 공이 컸다. 특히 여성 지도자들의 노력이 많았다. 이때 헌신적으로 일한 분 중 하나가 "안조앤"이다. 도산 안창호의 사촌 안영호의 부인인 안조앤은 1944년 Wilbur Choy(후에 감독이 되신 분)가 중국 교회의 전도사로 임명받았을 때, 한인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본처 전도사(Local Preacher)로 임명받아 본 교회를 열심히 도왔다. 안조앤은 연회 신도 대표로서 또한 연회 여성회 재무로서 교회와 연회에서 활동을 많이 하였다. 그는 1997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오클랜드한인연합감리교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노정순과 노신태 또한 본 교회의 역사에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분들이다. 노정순은 새크라멘토에서 농장 일을 하던 노신태와 사진 약혼을 한 뒤 1923년 3월 부산에서 결혼식을 한 후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왔다. 그후 노신태는 이발사 면허를 받아 농장 일을 그만두고 1926년 오클랜드로 이사하여 이발소를 개업하고 노정순은 선원들을 위하여 공중 목욕탕을 경영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었다. 1945년에는 그들의 한달 수입이 $2,000에 달했다. 자신들의 초기 이민 생활의 고통을 회상하면서 그들은 교회를 통하여 이민자들을 많이 도왔다. 1946년 노신태는 연회에서 전도사로 피택되어 1952년까지 김창수 목사를 도와 교회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오클랜드한인연합감리교회는 처음부터 여성 교우들의 활동이 활발하여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성전 건축과 성장
1973년 4월, 태평양신학교에서 박사 학위 공부를 하던 김광진 전도사가 부임하면서, 본 교회는 건실하게 성장하는 시기를 맞는다. 16년 간 교회 담임 교역자로서 일한 김광진 목사는 모든 것을 바쳐 교회 성장에 힘을 기울였다. 안정되지 않은 초기 이민 사회 동포들의 외로운 마음을 잘 간파한 그는 목회의 우선권을 목회적 돌봄(Pastoral Care)에 두고 교인 상호 간의 친교와 사랑을 바탕으로 교회를 확대된 한 가족으로 만들었다. 각 가정의 경조사는 곧 교회 공동체의 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특히 사모의 내조는 기억될만하다. 노인 아파트의 교인들을 모셔 와야 하는데, 교회 밴을 운전할 사람이 없자, 작은 체구의 사모가 직접 운전대를 잡고 운전했다고 한다.
교회 건물이 협소하여 발전이 더디고, 예배 및 교회 생활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가, 1984년 현재의 건물을 매입하면서 그 고충을 떨어버리게 된다. Oakland E. 17th St. 와 8th Ave.에 위치한 현재 교회 건물은 독일계 감리교인들이 사용하다가, "라이프 태버내클"(Life Tabernacle)에 매각했던 것인데, 16년 만에 오클랜드한인연합감리교회에 의해 다시 감리교회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자체 건물을 소유하게 되자, 교인들 간에 더욱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익고 평안한 가운데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주일 예배 장년 출석 인원이 100여 명에 다다르게 되어 명실공히 당시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로 자라게 되었다.
대 사회 봉사에 앞장 선 오클랜드한인연합감리교회는 "이스트 베이 한인 봉사회"를 태동시키는데 산파 역활을 감당하기도 했다. 이때 이광호 변호사의 역할이 지대했다.
질적 향상 목회
1988년 김광진 목사가 연합감리교회 서부 지역 선교감리사로 전임하면서 김종원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김 목사는 부임하자마자 대심방을 시작하여 교인들과 친숙해지기 시작하면서 양보다는 질적인 신앙 향상에 목회의 초점을 맞추었다. 약 1년에 걸친 전교인 제자화 훈련을 통해 교인들의 기본 신앙 재확립에 힘썼다. 제 2 선교회(회장 김우정)가 주관하는 "신학의 밤" 행사를 통하여 교인들의 신학 훈련에도 힘을 기울였다. 주일 예배로 모인 교인들을 위해 전교인 성경 공부를 정규 프로그램으로 도입하였으며 교인들의 대 사회 봉사도 적극 장려하였다.
주일학교와 중고등부도 매우 활발했다. 오클랜드한인연합감리교회 성가대원들이 주축이 되어 창단된 에클레시아 합창단은 샌프란시스코 마스터 코랄로 발전하여 베이 지역의 대표적인 한인 합창단이 되었다. 해마다 여선교회에서는 바자회를 열고, 이웃에 사는 타인종 사람들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선물을 증정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나누었다.
김종원 목사는 특히 1992년 4월 29일 '나성 흑인 폭동 사건'이 발생한 직후 한상은 목사와 같이 오클랜드 지역 "한흑 성탄 연합 예배"를 구상하여 흑인 사회와 한인 교회 간의 친화를 도모하는 일에 크게 이바지하기도 했다.
1988년부터 1998년까지 10년 동안은 겉으로 드러난 큰 잡음 없이 평온한 가운데 교인들의 질적 향상과 아울러 양적인 성장도 따른 복된 목회 기간이었다. 주변 환경이 깨끗하지 못하고 약간 위험한 약점 (밤에는 간간이 총성이 울리기도 했고 대 낮에도 길거리에 세워놓은 자동차의 유리를 깨고 차안의 물건을 훔쳐 가는 일이 종종 있었으며 교회 주변 거리는 청소가 되지 않아 쓰레기가 항상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전반적으로 고른 성장을 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하나된 교인들의 신앙이 모든 악조건을 이기고 초월하게 하였다.
영어 목회(English Language Ministry) 시도
김종원 목사가 65세로 은퇴하고 한국의 신학 대학원의 교수로 부임한 후 교회는 큰 꿈을 가지고 1.5세 목사를 담임목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고령화 되어 가는 한국어 회중의 장래를 생각하고 한국으로부터의 이민 수가 정체된 상황을 감안할 때 교회의 장래는 현재 영어권에 있는 차세대의 몫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과감하게 세대 교체를 시도하기로 결정하고, 젊은 교역자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동시에 교회의 평신도 기능직도 가급적이면 젊은층으로 대거 이동시키면서 새로 부임한 교역자와 원활한 협력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신앙 노선의 차이 등으로 인해 큰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영성 목회와 지역 사회 개선을 병행한 전도
2001년 김무영 목사가 본 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부임 당시 오클랜드한인연합감리교회는 많은 상처를 안고 있었다. 청장년 층의 대부분이 교회를 떠난 상태이고, 어린이 주일학교에는 학생이 없었다. 장수 선교회(회장 방흥규 권사)의 멤버들이 교회의 중추적인 구성원으로 되어 있었고, 60대가 대부분의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김무영 목사는 "기도, 말씀과 심방"의 삼대 목회 방향을 세웠다. 매일 새벽 기도회로 영성 회복에 우선적으로 힘을 기울였다. 교회는 "OK 기도 운동"을 실시했다. 담임목사는 교회에서 기도하고 교인은 가정에서 합심해서 기도하는 운동이다. 담임목사는 교인들의 일어나는 시간을 모두 받아 그 시간에 교회 강단에서 기도하면서 목사와 교인이 같은 시간에 합심하여 하는 기도 운동으로 약 100여 명이 동참했다. 시간대 별을 보면 오전 4:00에서 아침 9:00시까지 되어 있어 매일 기도 시간은 5시간이 되었다. OK 기도 운동은 상처입고 낙담한 가운데 빠져 있는 교인들의 심령에 새로운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두 명의 사람이 참석하던 새벽 기도회에 평균 10여 명이 참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요 성경 공부를 "찬양과 경배"로 바꾸면서 찬양팀(팀장 조종애 집사)을 구성하여 찬양에 힘썼다. 처음으로 가진 황국명 목사 초청 찬양 부흥회는 성공적이었다. 교회를 떠났던 이들이 하나 둘 돌아 왔다. 남선교회(회장 김동철 권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멀티미디어 프로젝터를 구비하면서 주일 예배는 현대 문명의 이기를 최대한 활용하게 되었다. 찬양이 살아야 예배가 살고 기도가 살아야 신앙이 산다는 신념 하에 교회는 찬양과 기도의 사역에 힘을 기울였다.
전도 위원회(위원장 조상호 장로)에서 계획하고 각 속회가 협조한 가운데 대심방을 실시했다. 6개 속회를 한 달에 한번씩 모이도록 하면서 담임목사는 각 속회를 순회했다. 지역사회 속의 교회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이웃에 사는 타인종 어린이를 위한 "방과 후 학습 지도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 전석영 권사와 윤행자 집사의 헌금으로 기금은 마련되었다.
김무영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한 후 2개월 후에 김용환 전도사가 영어부 첫번 담임 교역자로 부임했다. 50대의 의사(MD) 가족에서 대학을 갖나 온 20대 초반의 청년들에 이르기까지 주로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들로 구성된 영어 목회부는 신앙관과 세대차가 두드러진 작은 교회 공동체였다. 협소한 파킹장, 베이비 씨터, 예배 시간 등등 외형적인 문제 등등 있었다. 이런 문제거리들을 잘 해결하면서 원만하게 사역하고 있다.
20년 간 손대지 않았던 교회를 수리하고 교회당 옆에 위치한 목사관도 수리했다. 이 일은 여선교회(회장 윤행자 집사)에서 교회 친교실 페인트 작업을 시작하면서 시동이 걸렸다.
2002년 10월 8일에,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가 인준한 "미주감리교신학대학교"(Methodist Theological Seminary in America) 북가주캠퍼스(Northern California) 개교 예배를 새롭게 단장한 오클랜드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 보았다. 박상혁 감독, 교수, 목회자, 학생, 교인 등 100여 명이 모여 예배 드림으로 '한인 감리교 신학교' 북가주 시대의 역사적인 막을 올렸다.
이제 21세기를 맞아, 교회의 문을 활짝 사회를 향해 열고, 더 나아가 세계를 향해 문을 열 꿈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단단한 영성과 탄탄한 전통을 기반으로 해서, 이 모든 사역을 우리는 다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글쓴이: 김무영 목사 오클랜드한인연합감리교회, 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