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삶의 주기에 걸쳐서 여러 가지 상실을 경험한다. 모든 상실은 소중히 여기는 무언가와 분리를 일으킨다. 아이들은 자신이 기르던 애완동물의 죽음으로부터 첫 상실감을 경험할 수도 있고, 죽음으로 인해 조부모 혹은 부모와의 소중한 애착관계를 상실할 수도 있다. 어른들은 직업의 변화, 은퇴, 삶의 터전 이동, 역할, 신체의 기능 등의 상실을 경험한다. 모든 상실의 경험들이 다 슬픈 일이지만, 죽음으로 인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는 것은 모든 상실 중에서 가장 슬픈 일이다.
이렇게 죽음으로 인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정서적, 심리적 반응을 슬픔/비탄(grief)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반응에는 충격, 죄책감, 분노, 절망, 슬픔, 고뇌, 혼란과 무감각 등이 있으며, 이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과 행동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갑작스러운 죽음이든, 예상되던 죽음이든 간에 모든 죽음은 남겨진 사람에게 이러한 감정적, 심리적, 신체적인 반응을 보이게 한다. 이는 누구나가 겪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며, 이러한 애도의 과정을 겪으면서 점차 안정을 되찾게 된다.
반면에, 복잡한 애도(complicated grief)의 과정을 겪는 사람도 있다. 이는 일반적인 반응과 다르게, 슬픔이 지연되거나(delayed grief), 너무 오랫동안 슬픔을 경험한다거나(chronic grief), 과장되거나(exaggerated grief), 또는 가장되는(masked grief) 슬픔의 반응을 말한다. 이러한 반응들로 인해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기 힘든 상태가 지속된다면 이를 복잡한 슬픔 반응이라고 진단할 수 있고, 전문적인 상담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슬픔을 겪는 모습, 기간, 강도가 다르다. 이는 죽은 사람과의 애착관계(attachment)나 죽기 전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도 그렇다.
또한 트라우마를 남기는 죽음도 있다. 사고나 재해 등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죽음의 경우에는 외상성 슬픔(traumatic grief)을 겪게 된다. 특별히 이를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거나, 죽음의 장면을 목격한 경우에는 트라우마가 더욱 커진다. 이뿐 아니라, 자살한 사람의 가족들은 불명예나 수치심 때문에 드러내 놓고 슬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살, 에이즈, 유산과 같이 사회의 부정적 시선 때문에 드러내지 못하는 슬픔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은 슬픔(disenfranchised grief)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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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죽음으로 인한 상실은 남겨진 사람에게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안겨준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회복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더 많다. 언젠가 생각하지 못한 때에 그 슬픔이 드러나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더욱이, 한국적인 정서에서는 슬픔을 표현하기보다는 참는 것이 덕이라고 생각한다. 울면 “울지 말라”고 “이만하면 됐다”고 말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면서 슬픔을 제대로 표현하면서 애도의 과정을 거칠 여건을 마련해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울어라. 울어도 괜찮다”고 말을 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상실 후, 처음 며칠은 충격으로 인해 혼돈된 상태이기 때문에 울음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감정의 흐름이 멈춰버린 무감각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라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있어 주는 것이 더 중요하지, 슬퍼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자신의 잣대로 좌지우지하려는 것은 좋지 않다.
이러한 경우들은, 위로의 방법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슬픔을 겪는 가족들에게 신앙적인 위로를 주기 원하는 목회자들이 간혹 실수하는 경우가 있다. 목회자들은 위로의 방법으로 성경 구절을 인용하게 되는데, 적당한 시기에 적절한 말씀이 아닌 경우에는 위로가 되기보다는 상처가 된다. 가령,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거나 죽음의 의미를 애써 설명하려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앤더슨과 미셸(Herbert Anderson and Kenneth Mitchell)은 이를 “미성숙한 위로”라고 말한다. 차라리 아무 말을 안 하고 곁에 머물면서 손을 잡아주는 것이 큰 위로이다.
그러기에 슬픔치유를 위한 상담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목회적 돌봄과 상담에 중요하다. 첫째 원리는 ‘함께하기’다. 애도상담의 권위자인 앨런 울펠트(Allan D. Wolfelt)는 상담을 치료(treatment) 과정이 아닌, 동반(companion)으로 이해한다. 치료는 진단을 기반으로 한 문제 해결이 기본 원리라면 동반한다는 의미는 아픔과 슬픔을 겪는 사람 곁에 전적으로 함께 있으면서 마음을 보듬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의 동반하기를 위한 11가지 원리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영혼의 광야에 함께 거하는 것”이다. 즉 목회자는 교인과 힘든 과정에 몸과 마음이 함께 있으면서 판단하거나 방향을 제시하지 않고 기다리며 함께하는 것은 위로를 위한 우선적인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물어보는 것’이다. 한국 사람은 대개 다른 사람의 감정을 물어보거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어떤 때는, 혹시 상처를 주는 일이 될까 염려하여 자세히 묻는 것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 또한 한국의 정서상 ‘뭘 그걸 굳이 물어’하는 식의 사고가 있기에 자세히 물어보는 것이 실례가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슬픔을 가중시킨다고 생각하기에 감정을 묻거나 듣는 일을 불편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목회자는 확신을 가지고, 진실하게 돌보는 마음으로 교인에게 슬픔에 대해 묻는 것이 좋다. 그럴 때 교인도 마음을 열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할 기회를 얻게 된다.
몇 해 전 신학대학원에서 강의할 때 한 여학생이 유산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당시 부모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산모의 건강과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희망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이 유산한 산모의 감정을 물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대개 사람들은 “아이는 또 가지면 된다”라는 식으로 위로했다고 한다. 하지만 만일 한두 살짜리 아이가 죽었을 때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유산이나 사산의 경우는 실제 아이의 죽음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를 품고 있으면서 부부가 함께 즐거워하고, 태명을 부르며, 아이를 향해 기대하고 꿈꾸던 미래가 사라진 것이고, 아이가 죽은 것이다. 위로하려고 했던 말들이 사실은 상처를 주거나 실망을 안겨줄 수 있다. 물어본다는 것은 마음을 털어놓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좋은 위로의 방법이다.
세 번째, 일단 물어봤다면 ‘공감적 경청’의 태도가 필요하다. 목회 상담에 있어 듣는 것은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교인의 감정을 어떻게 들어주느냐에 달려있다. 일상생활에서 관찰하면 어떤 사람은 건성으로 듣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물어봐 놓고서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면 제대로 경청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냐?”라고 묻는다면 그냥 건성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제대로 들어주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공감적 경청은 위로가 필요한 교인의 마음을 여는 열쇠이다. 경청한다는 것은 온전히 동참(fully attentive)하는 것이다. 즉, 목회자는 온몸과 마음을 다해 듣는 것이다. 그래서 “내 모든 것이 당신을 향해 듣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몸과 마음의 태도가 필요하다. 영혼의 귀로 듣고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네 번째, 듣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감정을 인지해주는 것’은 위로를 위한 돌봄에 있어서 핵심이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애도 가운데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공감적으로 들으면서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공감하고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가 어떤 감정인지 잘 인지하지 못한다. 자신의 구체적인 감정을 잘 모른 채 이야기하게 될 때 목회자는 그 사람의 감정을 인지(validating)해 줄 수 있다. 특별히, 죄책감이나 수치심, 후회나 미안함처럼 숨기고 싶은 감정들은 잘 표현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감정들을 인지해 준다면 정서적인 환기를 경험하고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더 잘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애도상담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사람이 자신이 경험한 여러 가지 상실을 상실이라고 느끼지 못하고 산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상실로부터 오는 자연스러운 감정들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경우가 많다. 상실로부터 오는 주요 감정들은 충격, 무감각, 슬픔, 외로움, 분노, 절망, 좌절, 죄책감, 불안, 초조, 두려움, 무력감 등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감정들을 인지해주는 것은 그 감정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이러한 감정들을 이해해주고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뢰할 만한 목회자가 있다면, 어려운 시기를 잘 겪어 나아갈 힘이 될 것이다.
다섯 번째는 ‘답 안 주기’이다. 대부분의 목회 상담이 그렇지만 장례 이후에 가족을 방문할 때,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목회자가 문제를 해결해주려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왜?” 혹은 “어떻게?”라는 질문은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힘든 상황을 토로하고 이해해 달라는 하나의 방식인 것이지, 실제로 답을 달라거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닌 때가 더 많다. 그렇기에 답을 주게 되면, 그 교인의 마음 깊은 곳을 탐색하면서 그 마음을 표현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앨런 울펠트의 말처럼, 슬픔치유를 위한 돌봄과 상담은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목회자는 슬픔이라는 긴 광야 여정에 있는 교인들 곁에 함께 있으며 기도와 마음으로 지지해 주는 것이 좋다.
여섯 번째는 ‘의례의 활용’이다. 콜(Allan Huge Cole)은 좋은 애도를 위한 다섯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상실을 받아들이기, 상실을 감내하기, 상실에 적응하기, 상실을 재배치하기, 상실과 함께 머물기(Sojourning)이다. “머문다”라는 것은 어딘가를 방문해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의미하며, 휴식과 회복을 내포하는 말이다. 머물기를 통해, 고인과 나누었던 추억들을 떠올리고 기억하는 과정을 통해 감정적, 공간적 재배치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콜이 제시하는 것은 사랑했던 사람이 의미 있게 생각했던 장소 방문하기와 의미 있게 생각했던 활동에 동참하기가 있다. 또한, 걷기, 조용한 장소에 앉아 있기, 시골길을 운전하는 것, 무덤을 방문하거나 함께 공유하였던 물건이나 사진들을 보는 것을 통해 “머물기”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더불어, 다양한 신앙 의례들 (기도, 성경 읽기, 예배, 그리고 성찬) 또한 교인의 상실과 머물기 위한 좋은 예로 제시하고 있다. 가까운 박물관, 카페, 음식점, 공원 등 조용히 고인을 추억할 만한 공간에서 머무는 과정은 분명 좋은 애도를 촉진할 것이다.
이렇게 위로를 위한 기본적인 상담의 원리로 함께하기, 물어보기, 공감적 경청하기, 감정을 인지하기, 의례 활용하기를 제시하였다. 윌리엄 워즈워스는 “깊은 고통은 영혼을 인간답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르는 공간의 체험, 그것은 반드시 겪어야 할 사별 슬픔의 한 과정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교인이 다시 삶으로 돌아와 이전보다 더 건강한 자아로 서기 위해서는 깊은 침묵 가운데 광야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 교인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고통의 혼란스러움 가운데 함께 거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동반자인 목회자이다. 만일 애도의 과정에 영혼의 귀로 듣고,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목회자가 없다면, 그 교인은 빠른 회복을 강요하는 현대사회의 뒷방에서 홀로 몰래 애도하거나 슬픔에서 벗어나려 노력하게 될 것이다.
윤득형 박사는 감리교 목사로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죽음교육과 애도상담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웰다잉, 호스피스, 연명의료, 목회상담, 임상목회교육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감리교신학대학교 객원교수이다.
오천의 목사는 한인/아시아인 리더 자료를 담당하고 있는 연합감리교회 정회원 목사이다. [email protected]나 615) 742-5457로 연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