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뉴욕한인교회 약사
1992년 5월에 발행된 뉴욕한인교회 70년을 담은 역사책 제목은 "강변에 앉아 울었노라"이다. 그 서럽고 아름다운 제목은 시편 137편 1절에서 따왔다. 삼일운동 직후 국가 독립의 열망이 점점 높아져 가는 것을 먼 이국 땅에서 바라보며, 서러움에 북받쳐 강변에 앉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울었을 것이다. 유장하게 흘러내리는 허드슨(Hudson)강, 그 탁한 물에 한 맺힌 눈물을 뿌렸던 선배들의 발자취는, 1960대 미국 이민법이 발효되면서 대거 밀려온 한국인 이민자들의 숫자 속에 그만 묻혀 버리고 말았다. 미 동북부 지역에 최초(1922년)이자 1960년대까지는 단 하나뿐인 한인 교회였던 뉴욕한인교회는 그 81년의 역사만큼이나 많은 사연들을 간직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1922년 3월 1일 뉴욕 타운 홀에서 삼일절 제 3주년 기념 대회가 있었다. 기념 대회 직후 조선 독립 운동을 지원하고 있던 킴버랜드 여사(Mrs. Angie Graham Kimberland)의 사무실에서 기념식 평가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킴버랜드 여사의 제안으로 교회 창립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시작되었다. 삭크만 목사(Rev. Dr. Ralph W. Sockman)가 자신이 목회자로 있던 "매디슨애비뉴감리교회"(Madison Avenue Episcopal Methodist Church: Madison Ave. & 23rd St.)에서 예배하도록 제안했다. 그 제안을 받아들여 3월 또는 4월 어느 날 임종순 목사의 인도로 첫 예배를 드렸다. 40여 명 교인들의 대부분이 유학생들이었다.
1923년 4월 15일에 건물(459 W. 21 Street)을 구입하고 첫 입당 예배(감리교의 City Missions and Church Extension Committee의 재정적 도움을 받음)를 드렸다. 교회 이름을 지금도 우리 교회의 공식 명칭인 "Korean Church & Institute"라고 했다. 그 이후 현재의 위치(633 W. 115th St. New York, NY 10025), 컬럼비아대학교(Columbia University) 건너편 골목에 작은 건물 절반을 사서 1927년에 이사왔다. 처음 교회 창립 과정 및 새 건물 구입 과정에서 뉴욕연회의 재정적 지원과 감리교 인사들의 협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1920-30년대에 우리 교회는 뉴욕 한인들의 조국 독립 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이때 각종 한인 모임의 중심지 역할을 우리 교회가 해 내었다. 1960년대 이민법이 통과되기 전까지는 뉴욕 지역 뿐만 아니라 동북부 지역에 교회라고는 우리 뉴욕한인교회 하나뿐이었다(약 40년 간). 자랑스런 전통, 배달 겨레의 민족 교회로서의 위상을 세웠다.
1920년대 인종 차별의 설움과 1930년대 대공황의 위협으로 힘든 생존을 버텨온 뉴욕한인교회는 그 작은 4층 건물에 20여 명의 유숙자들을 두고, 그들의 삶의 문제를 도왔다(그래서 Institute이라고 덧붙이는 명칭이 여전히 맹장처럼 남아 있다). 교회가 자랑하는 옛날 교인들 대부분이 이 기간의 교인들이다. 그때는 유학생들 혹은 유숙생들이었으나 후일 한국에 돌아가 지도적 인물들이 된 사람들이 많다. 조병옥, 김활란, 박마리아, 박은혜, 박인덕, 장리욱, 안익태, 등등이 그들이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한 시대를 엮어 가는데 공과를 남긴 이들 말고도 더 많은 사람들이 뉴욕한인교회를 거쳐갔다(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몇 차례 방문). 지금도 낡은 교회당 안에 들어가면, 그런 이들의 음성을, 그들의 기도 소리를 들었을 벽과, 그들의 눈물을 마셨을 마루가 새삼 엄숙한 느낌을 준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들고 살았던 신앙의 선배들로서 오늘도 우리들에게 무언의 말을 하는 것 같다.
제 1대 담임 임종순 목사(1922-1923년) 이래, 제 14대 담임 한성수 목사 (2003-현재)에 이르기까지 세월만도 81년이요 담임 목사들만도 14대를 거듭한다. 뉴욕한인교회를 섬겼던 담임자들을 일일이 매거할 지면이 없을 정도이다. 최근에 가장 널리 알려진 분은 아무래도 제11대 담임 (1975-1988년)이었던 최효섭 목사와 12대 담임 차원태 목사(1988-2000)일 것이다. 둘 다 널리 알려진 설교자들이었는데, 이에 반하여 교회 분열이란 미증유의 커다란 상처를 입은 것은, 참으로 하늘이 우리 교회를 겸손하게 만드시려는 경륜이었을 것이다.
최효섭 목사 재임 시에는 이민법의 도움으로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만하탄 둘레에 흘러 들어와, 처음으로 주일 예배 출석 인원이 400여 명을 넘어섰다. 예배 공간 확보를 위해 세인트힐다학교(St. Hilda School) 채플을 빌려 주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1960-70년 대에도 여전히 우리 교회는 뉴욕 일원의 한인 모임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한국의 신학자들 다수가 이때 교회의 성경공부를 지도했다(김이곤, 김득중, 서중석, 김홍기, 한완상, 한호석, 한성수, 등등). 또한 당시 김병서 교수의 인도로 '청년부 사상 강좌'를 열어, 여러 학자들 혹은 지식인들이 다각도로 신학 및 사상 강좌를 펴서, 청년부의 진취적 시야를 여는 큰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지금 한국에서 이름을 떨치는 많은 음악인들이 이때 교회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뉴욕 목요 기도회'의 역할도 괄목할만하다. 한승인 장로를 비롯한 뉴욕 지역 진보적 인사들이 모여 1975년 6월 조직한 '뉴욕 목요 기도회'는 매월 교회 지하실에 모여 20여 년 동안 조국의 민주화 투쟁을 위해 기도하고 활동했다. 한국 정부에서는 반정부 단체의 대표로 여겼을 정도였다. 김재준, 함석헌, 문동환, 이우정, 백기완, 김찬국, 한완상, 김대중 등이 강연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 45만 뉴욕 지구 한인 동포들의 대표성을 갖는 '뉴욕한인회'도 그 처음은 우리 교회에서 시작하여 한동안 모든 모임의 장소는 물론 중심 인물들이 대부분 본 교회 교인들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교회가 가장 번성하였을 때, 교회는 분열을 겪는다. 최효섭 목사의 사임과 허드슨 강을 건너 뉴져지 쪽으로 건너가 새로운 교회가 생기는 아픔을 겪었다. 차원태 목사 재임 시 이른바 신령직 임원(장로, 권사, 집사 등)을 교회 내 계급이란 이유로 폐지하는 큰 고비를 넘었다. 이로 인한 커다란 물결의 파장이 지금까지도 지속되고는 있지만, 하여튼 뉴욕한인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미래 교회로 가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기를 바란다. 당시의 장로들이 장로 제도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에 남아 자리를 지키는 모습은 얼마나 겸손하고 아름다운가!
내다보니: 한성수 담임목사의 변명과 희망
뉴욕한인교회는 그 장구한 81년의 역사와 지난 날의 찬란한 행적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솔직히 깊은 늪에 빠져 있다. 자식 많이 낳아 다들 출가시키고 난 후, 초라해진 어머니의 모습만큼이나 왜소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소간 서럽다. 현재 뉴욕한인교회는 주일 예배 장년 출석 평균 100여 명, 교회학교 15명, 영어 예배 회중 40여 명 정도의 작은 교회이다. 옛날의 영광에 비교하면 그야말로 쪼그라든 어머니 모습과도 같다. 만하탄의 콜럼비아대학교(Columbia University) 건너 편에 있기에, 애초에 한인 유학생 중심으로 교회가 설립이 되었고, 또한 학생들이 머물다 떠나가는 정거장 교회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게 변했다. 첫째로 만하탄(Mahattan)에 있는 것이 유리했던 지난 날과는 달리, 이제는 주차장 시설이 없는 교회로서의 설움을 당하고도 할 말이 없는 위치에 우리 교회가 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뉴져지, 북부 뉴욕 등 먼 거리에서 차를 타고 교회에 나온다.
둘째로 이 교회 전통으로 쌓여온 현실이, 최근에 유학 오는 넉넉한 가문 출신 학생들의 신앙적 현실과 잘 맞지 않는다. 흔히 뉴욕한인교회는 뉴욕 지역의 진보적 신앙의 교두보(橋頭堡)라고 여겨 왔기에, 이른바 복음주의적(혹은 보수 근본주의적 신앙이나 다름없는) 신앙으로 세뇌된 청년들은 주변에 훨씬 더 많이 포진하고 있는 편리한 한인 이민 교회들로 몰려간다. 서울의 대형 교회에서 잘 성장한 청년들이 뉴욕한인교회의 진보적 경향에 고개를 돌린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뉴욕한인교회는 스스로 진보 신앙의 성채로 만하탄을 지킬 것을 각오한다.
셋째로 군소 교회들이 난립하여, 교인 한 사람 놓고도 전도 대상으로 경쟁하듯 덤비는 세태가 뉴욕 지역에도 벌어진다. 이른바 교회 생존 자체가 문제로 등장한 현실이 참으로 가슴 아프다. 콜럼비아대학교 정문 앞에 주일이면 교회 버스를 대놓고 학생들을 실어간다. 제 발로 걸어가도 될 거리에 있는 우리 뉴욕한인교회 교우들은 굳이 멀리 있는 교회로 가는 학생들에게 그저 미안할 뿐이다. 우선 살고 보아야 하는 현실적 절박감에 눌려서 신학이고 뭐고 꿩 잡는 게 매란 명언만 울리고 있다.
넷째로 이제는 도시 중심을 벗어난 지역에 상당히 안정되고, 훌륭한 시설을 잘 갖춘 교회들이 많이 생겼다. 굳이 멀리 달려와서 주차할 곳 찾느라고 복잡한 만하탄 거리를 몇 바퀴씩 돌면서라도 이 교회에 나와야만 될 뚜렷한 이유가 없게 되었다. 이런 것을 염두해 보면, 뉴욕한인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그러나, 뉴욕한인교회는 그 축소된 크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다른 주목을 받는다. 이 교회는 미주 한인 동포들의 여정을 지켜보고, 또 앞날을 이끌어 나갈 이정표를 세우는 선도자로서 여전히 특별한 사명을 지닌 교회이다. 이 교회는 뉴욕 하늘 아래 반드시 있어야 한다. 단순한 전통이나 어줍지 않은 뉴욕 지역 어머니 교회 타령이 아니라, 다른 많은 교회에서 할 수 없는 일, 이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 이 교회가 감당해야 될 사명감이 이 교회에는 있기 때문이다.
한인 교회에서 저 악명(?) 높게 유명한 정현경 교수(유니온 신학교가 몇 불럭 가까이에 있어서 만은 아니고)가 교회 포럼에 와서 강연을 해도 많은 교인들이 오히려 배운 것이 많다고 하는 교회가 이 교회이다. 청장년부 공부방에서는 불교의 스님이 와서 특강을 해도 환영을 받는 교회, 따라서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한 이 교회에선 열린 가슴으로 응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 교회, 여성 목회자를 담임(이근애 13대 담임, 2000-2002년)으로 받아들인 교회, 신령직 제도의 폐단을 인지하고 폐지한 교회, 현재 사모(여금현 목사)의 특수 독립 목회(무지개의 집: Rainbow Center)를 지지하는 교회이다.
임창영, 임순만, 최효섭, 차원태 목사의 진보적 경향의 설교가 오히려 교인들에게 많은 은혜를 끼쳤다는 교회, 그래서 설교자가 강단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신념이 많은 교인들의 공감이고, 그러기에 옛날부터 뉴욕을 방문한 많은 지도적 인사들이 주일 예배 강단에서 귀한 말씀들을 떨구고 갔던 교회이다. 안수 받지 않은 평신도라 할지라도 할 말과 들을 말이 있으면 주일 예배 강단에 세우는 교회,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지만 또한 마음대로 한 설교는 상당한 비판도 각오해야 하는 교회가 바로 뉴욕한인교회이다. 이런 특성을 가꾸어 온 교회라는 점만으로도 존재 가치가 충분히 있고, 또한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현재 200여만 불의 건축 헌금이 적립되어 있는데, 지금이라도 이 건축 헌금을 들고 교외로 나가면 상당한 크기의 건물을 구할 수도 있지만, 우리 뉴욕한인교회는 미래를 내다보며, 그리고 지난 날을 돌아보며, 이 자리를 지키기로 결정했다. 1927년에 입주한 이래 처음으로 대대적 건축 보수 공사를 하고 나면, 만하탄 문화의 거리에 작지만 아담한 한국인들의 문화 공간을 제공할 다용도 교회 시설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한 발자국 앞서 가는, 아니, 옛 것을 귀하게 여기면서도 새 것을 과감히 수용하는(溫故知新) 교회로 일어설 것이다.
뉴욕 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영어 회중(ELM: English Language Ministry)이 그들만의 목회자(현재 Rev. Mark Kim)를 중심으로 탄탄하게 구성되어 있다. 한국어 회중(Korean Language Ministry: KLM)과 대등한 파트너가 될 만큼 성장한 지난 날의 자식들을 이제는 더 이상 자식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재정적으로 행정적으로 완전히 독립적이면서도, 재단 이사, 건물 유지, 교육 등 공공의 관심사에는 함께 손잡고 힘을 모은다. 한인 교회의 한 귀퉁이에 들어 있는 이른바 2세들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당당히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한인들의 후예로서 어른들과 한 지붕 밑에서 균형을 이루어 가고 있다. 영어 회중 역시 동부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최초로 세워진 영어 회중 교회이다. 실질적으로 완전히 독립된 모습이 우리 교회의 큰 자랑이고 보람이다.
무엇보다도 현대의 지성이 발견해낸 모든 학문적 결과를 겸손히 수용하는 교회, 신앙을 빙자하여 이성을 말살하는 억지를 사양하는 교회, 교리니 신조니 전통이니 하는 것들보다는 예수님의 정신에 눈과 귀와 마음을 맞추는 교회, 최소한 억압적이고 교조적이고 독재적인 폭압 보다는 상식이 통하는 교회, 민주적 질서가 이룩된 교회, 그리하여 목회자의 권능과 유명함보다 진정 평신도들의 삶이 더 큰 관심이 되는 교회, 재정적 투명성이 확립된 교회, 진리 타령에 분열적 투쟁을 벌이기보다는 심미적 감성에 아름다움을 귀하게 여겨 삶에 배워들이려는 교회, 사회 정의에 민감하지만, 개인의 품성에 미치는 사랑의 영성을 강조하는 교회, 해외 선교 문제에는 상당히 소극적이고 비판적이지만, 조국의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에는 훨씬 전향적 태도를 지니고 민주화 운동에 이어서 통일 문제에도 적극적 관심을 갖는 교회,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회 내의 유교식 계급주의인 장로 제도를 극복한 교회로 일어설 것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교회를 옮기려고도 여러 차례 시도해 보았다. 그것을 통에 1988년 교회 역사상 가장 아팠던 분열을 겪기도 했다. 이제 배울 만큼 배웠고 겪을 만큼 겪은 지난 날을 딛고 새로 일어설, 작지만 당당하고 진취적인 뉴욕한인교회를 위해 격려의 박수를 부탁한다. 이미 많이 있는 보수 신앙의 주류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보듬고, 열린 가슴으로 스스로의 고난을 감내하고 있음을 이해하고 기도해 주기를 바란다.
글쓴이: 한성수 목사, 뉴욕한인교회 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