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직접 제정하신 ‘성찬’은 말 그대로 거룩한 식사이자, 그분이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지속적으로 감당해야 할 의무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최후의 만찬> 때문에 흔히 ‘성만찬’이라는 명칭으로도 자주 일컬어지지만, ‘만찬’이 저녁이라는 특정 시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용어이니만큼 ‘성찬’이라는 보편적 용어로 통일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다. 익히 잘 알려져 있듯이 성찬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때, 즉 유월절 축제 기간 주님이 당신의 제자들과 더불어 식사하시던 자리에서 일상적인 분위기 가운데 제정되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성찬은 당대 유대교라는 종교 문화적인 배경을 가진 식사로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개방적인 구조를 갖는다. 아마도 예수님이 우리나라, 또는 다른 대륙에서 태어나셨다면 그 지역의 가장 대중적이고도 보편적인 일상의 음식으로 성찬이 제정되지 않았을까라고 상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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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승천 이후 남겨진 제자들은 주님이 하신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또한 당장 그들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 주님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의 염원을 담아 그분이 명하신 대로 모이기에 힘썼다. 그리고 그렇게 모일 때마다 떡을 떼는 일에 열심을 내었다. 이처럼 ‘이를 행할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오감으로 기억하며 기념하려고 했던 초대교회의 노력은 성서 곳곳에서 발견된다(고전 11:17-34; 막 14:22-26; 마 26:26-30; 눅 22:14-22). 그러한 노력의 목적은 은총의 수단으로서의 성찬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면서, 성령님과 더불어 하늘나라의 잔치를 이 땅에서도 누려가고자 했던 거룩한 열망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이러한 ‘모임’이 오순절 사건 이후 지금의 몸 된 ‘교회’로 발전했으며, 모여서 ‘떡을 떼는 행위’는 우리 ‘예배’의 원형이 되었다. 따라서 성찬은 언제나 기독교회 예배의 가장 핵심이었고, 초대교회 이래로 말씀과 더불어 균형을 갖추어 행해지는 예배의 본질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들리는 말씀인 설교와 보이는 말씀인 성찬의 균형이 예배의 구조적 균형을 형성한다.
때때로 역사의 흐름 가운데 이러한 신비의 성찬이 지닌 본질적 의미가 왜곡되는 경우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한 연유에서 예배의 개혁이기도 했던 종교 개혁이 일어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성찬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와 노력이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특별히 최근 코로나19 사태는 성찬에 대한 전 세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주의를 증폭시켰다. 하나의 빵과 잔을 통해 한 몸을 이루어내는 식탁 교제야말로 가장 강력한 사람 간의 접촉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 자리이다. 그렇다면 이는 누군가에게는 접촉으로 인한 바이러스의 전파와 감염의 위험이 가장 농후한 순간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법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개인 성찬 키트, 드라이브 스루 성찬 등 여러 대안적 방법을 총동원하면서까지 코로나 시기에도 성찬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자 했던 교회의 노력을 우리는 알고 있다. 왜일까? 사람에게 먹고사는 문제가 생명과 건강의 유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만큼,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말씀하신 명령을 준행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살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 됨을 힘써 지키고자 하는 교회의 열심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바로 성찬의 자리이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베풀어주신 주님의 몸과 피를 믿음으로 먹고 마시는 성도는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하게 된다. 그의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그리스도의 몸이 연약함을 강건함으로 치유하시고,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주홍빛보다도 더 붉은 그의 죄를 눈처럼 희게 씻으신다. 그렇게 임마누엘로 수찬자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어낸 성도 개개인은 이제 하나의 빵과 잔을 통해 한 분 하나님을 지체들과 더불어 공유한다. 그렇게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시며 한 몸을 이루어 낸 하나의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하나의 몸으로 거듭나며 그 전 존재(교회)가 하나님께 봉헌되는 산 제물이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말했던 영적 예배, 즉 우리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행위가 곧 거룩한 봉헌으로서의 성찬이 지니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물론 성찬이 지니는 여러 신학적 정의와 의미가 있지만) 부활과 구원의 식탁으로서 성찬이 지니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연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결혼하는 부부가 서로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며 하나 됨을 공표하고 서로 간에 징표를 세우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성도, 또 성도와 성도가 하나 됨을 실천하고 기억하며 드러내는 예식이 곧 성찬이다. 그리고 이렇게 연합한다는 것은 이 식탁 앞에서야말로 남녀노소, 빈부격차와 상관 없이 모두가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이자 그리스도의 제자로 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로, 이 순간이 완전한 정의와 평화가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의 작은 샘플이자 시식과도 같은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때린다’는 우리네 옛 속담처럼 먹는 자리에서만큼은 모두가 계급장을 떼고 함께 배불리 먹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특히 예수님은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식사 자리에서 이러한 평화의 연대를 더욱 강조하셨던 분 아닌가. 상석과도 같은 귀빈석을 별도로 지정해 그 자리에 멋들어 앉아 계셨던 것이 아니라 모두와 더불어, 더욱이 세리와 창녀, 낮은 자들의 벗이 되사 친히 그들과 먹고 마시며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미 공생애 기간에 아주 선명히 보여주셨다. 그런 주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나머지 식탁 위로 올라가 직접 그를 먹고 마시며 그 완전한 사랑으로 하나 될 것을 명하셨으니, 주님의 몸과 피 앞에서 누가 먼저 됨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누가 감히 자격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사랑과 정의, 평화와 연합의 성찬 정신이 오롯이 투영된 좋은 신앙의 유산이 있다. 바로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성찬주의자였던 웨슬리 형제의 찬송이다. 웨슬리 형제는 일찍이 여러 성찬 찬송 시들을 통해 그들이 남달리 애정하며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성찬에 대한 신학적 정리를 완성했는데, 특별히 존의 동생인 찰스의 여러 찬송 중 “복음의 잔치 자리에(Come, Sinners, to the Gospel Feast)”를 소개한다.
복음의 잔치 자리에 죄인들 모두 나오라 하나도 빠진 사람 없이 하나님 모두 부르셨네 핑계를 대지 말아라 은총을 거역 말아라 세상의 근심 걱정도 주님이 맡아 주시리 복음의 양식을 받아라 죄짐을 덜어 버려라 놀라운 구속 진미를 온전히 맛봐 알아라 눈을 떠 지켜 보아라 구속의 보혈을 감지하라 바치신 사랑 제단 위의 은총의 역사 확증하라 주님을 믿는 자 어서 오라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라 거룩한 잔치에 참여할 때 예수님 너를 안으시네 |
웨슬리 성찬 신학의 핵심이자 정수가 담겨있는 찬양의 가사들을 살펴보면 성찬이 지닌 관용적 은혜와 구원의 확증, 더 나아가 은총의 수단으로서의 이해가 여실히 느껴진다. 특정한 자격을 지닌 사람들만을 위해서 이 식탁이 차려진 것이 아님을, 도리어 죄 많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절실히 더 필요한 자들을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서 바꾸신 소중한 사랑이 이 자리에 놓여 있음을 우리가 깨닫게 된다. 그것이 값없이 주어진 은총이기에 어느 누구도 대가를 지불할 필요도 없이 그저 담대히 믿음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이 선포되며 이 찬양은 우리를 안심시키기도 한다. 그리하여 주님의 생명을 맛보고 누린 자가 결국 이 거룩한 자리에서 온전히 주님과 하나로, 성도와 하나로 연합하는 신비를 누리게 된다는 진리가 이 찬양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찬양이 불리며 감격과 은혜 가운데 참여하는 성찬을 상상해보라. 그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 선물로 허락해주신 모든 감각이 온전히 깨어나는 자리일 것이다. 눈으로는 나를 위해 채찍에 맞아 찢기신 주님의 살과 나를 위해 흘리신 붉은 주님의 보혈을 바라본다. 귀로는 그 은혜를 찬미하는 찬양을 듣는다. 빵과 포도주를 통해 그 사랑의 내음을 맡고, 손끝으로 만지며, 입 안으로 음미해 먹고 마신다. 충만해진 영으로 주님을 고백하고, 넘치는 사랑의 감정으로 나와 한 몸 이룬 형제자매들을 끌어안는다. 이와 같이 보고-듣고-만지고-향기 맡고-만지고-느끼고-감지하는 모든 감각이 총체적으로 일어나는 현장이 곧 성찬의 자리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그분의 형상대로 빚으신 우리 인간을 보시며 ‘좋았다’ 말씀하신 창조의 섭리가 찰나일지언정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체험이 이 성찬을 통해 경험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웨슬리 역시 하늘나라의 잔치를 현재 우리의 자리에서 선취하여 경험하는 것이 성찬이라 말했던 것이다. 어느 누구나 예외 없이 모두가 하나 되어 풍성함으로 채워지는 영적 경험은 그 옛날 출애굽했던 백성들을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던 하나님의 기적, 기진한 무리를 보시며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사건, 그리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정체를 알 수 없던 한 나그네와 더불어 먹고 마셨을 때 비로소 두 눈이 밝아져 주님을 고백할 수 있었던 성령님의 인도하심의 사건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그리고 현재진행형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끝없이 우리 모두를 초대하신다. 하나로 연합하는 정의와 평화의 식탁, 복음의 잔치 자리로 우리 모두 힘있게 나아가자!
오석진 교수는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 예배학을 가르치고 있다.
오천의 목사는 한인/아시아인 리더 자료를 담당하고 있는 연합감리교회 정회원 목사이다. [email protected]나 615) 742-5457로 연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