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례와 치유
-장례와 추모-
목회자들 나누는 말 가운데 “장례 한번 잘 치루면 교회가 성장한다.”는 말이 있다. 상실의 슬픔으로 힘든 시기에 목회자와 성도들이 조문하러 오는 자체가 우선 큰 위로이다. 게다가 목회자가 임종예배를 비롯하여 입관, 장례, 하관예배를 집례해주니 어려운 시기에 큰 힘이 된다. 그러니 장례가 끝나고 나면 사별한 교인은 고마움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듯 신앙생활을 더 잘하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더불어 이를 계기로 믿지 않는 가족들 가운데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생기게 되니 교회가 성장한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장례식을 포함하여 의례는 치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의례 학자인 드라이버(Tom Driver)는 “의례는 상황을 변화시키도록 디자인된 도구”이며, 인간의 삶은 의례 없이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의례의 중요한 기능은 변화(Transformation)이다. 개인적인 삶 뿐 아니라, 사회적인 상황 속에서 의례는 그러한 중요한 변화의 역할을 한다. 특별히 변화가 필요하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될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출산, 성년, 결혼, 장례 때 행하는 통과의례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다. 이 시기에 의례는 참여자들을 새로운 세계로 통합시키는 기능을 한다.

일찍이 의례의 기능에 관해 연구한 빅터 터너(Victor Turner)는 리미널러티(Liminality)와 커뮤니타스(Communitas)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는 반게넵(Van Gennep)의 세 단계 의례의 과정 (분리-separation, 전이-transition, 통합-incorporation) 중에서 전이 과정의 특징인 리미널(liminal)의 개념을 확장시켰다. 즉, 리미널러티는 의례가 진행되는 공간과 시간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어떤 신비로운 체험이다. 이는 의례가 행해지는 시간과 공강 안에서만 허용이 되는 상징적인 행위를 포함한다. 반면, 커뮤니타스는 의례에 참여한 참가자들이 리미널러티 안에서 함께 공유하게 되는 연대의식이다.
이러한 리미널러티와 커뮤니타스의 경험은 의례의 단계 중 전이의 과정에서 경험하게 된다. 전이의 과정 안에서 경험되는 영적체험이나 하나님과의 만남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목적과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흩어졌던 마음을 추슬러 다시금 살아갈 힘을 제공한다. 이러한 영적 체험이 사람들에게 치유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의례의 치유적 기능은 잘 고안된 의례, 즉 예배, 기도회, 영성 훈련 등 기독교 의례 안에서 체험될 수 있고, 장례와 추모 의례와 같은 죽음과 관련 의례에서도 경험될 수 있다.
장례와 추모의례는 사별을 경험한 사람들이 죽음을 인지하고, 슬픔을 표현할 길을 제시해 주며, 죽은 대상과의 영적인 결속을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특별히, 장례예배는 가족들을 비롯하여 공동체 일원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죽음을 공인하고, 감정을 표현하고,죽은 이의 삶의 가치를 인정하고, 다시 만날 소망을 얻으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례가 참된 치유와 변혁적인 힘을 지니기 위해서는 개인화(personalized)되고, 특별화(specialized)되어야 한다.
모든 죽음은 각기 다 다르다. 특별하다. 똑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똑같은 죽음을 죽는 사람도 없다. 개인적 혹은 가족적 상황에 맞는 특별한 의례는 사별자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모든 슬픔치유를 위한 의례는 죽은 사람과의 지속적인 결속을 강조하며 지난 삶을 기리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개인의 삶을 기리고 추억하며, 오늘의 삶 속에서 지속적인 결속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의례가 필요하다.
기독교에서 돌아가신 분과 가족의 신앙을 근거해서 장례예식을 ‘천국환송예배’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천국환송예배에서는 사별 가족들의 슬픔을 표현하기 어렵다. 만일 사별 가족이 울기라도 한다면, “천국에 가셨는데 울기는 왜 울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슬픔은 없고, 천국 길을 가신 고인을 환송하는 기쁨과 환희로만 가득 찬 예배라니, 그렇다면 그 마음속에 드러내지 못한 슬픔, 분노, 죄책감과 같은 감정은 어디서 토로하겠는가?
애도상담 이론 중 지속적 결속이론(Continuing Bonds Theory)은 사별 대상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애써 잊으려 하기 보다는 더 간직하면서 삶에서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는 지속적인 관계 유지를 강조한다. 이를 위해 상징과 의례가 중요하다. 특별히, 일반적으로 사별애도의 기간이 평균 1년 정도가 되기에 일주기 추모식(예배)을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미국 문화에서는 장례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나지 않을 무렵에 메모리얼 서비스(memorial service)를 별도로 하는 경우가 많다. 고인의 삶을 기리고 남겨진 자들을 위로하는 모임이다. 한국에는 삼일 안에 장례 절차가 끝나고 나면, 사람들이 다시 모여 고인을 추억하고, 삶을 기리고, 유가족들을 위로할 수 있는 별도의 시간이 없다.
게다가, 상실 초기 며칠 동안은 급격한 슬픔에 무감각과 혼동을 경험하는 때이다. 이 시기에 장례절차가 다 끝나버리니 실제 의례가 줄 수 있는 치유적인 효과를 경험하기 힘들 수 있다. 그러기에 비탄과 애도의 과정을 겪은 후에 별도의 모임이 필요하다. 추모 1주기가 바로 그러한 시간이 될 수 있다. 가족과 목회자가 함께 추모예배를 계획하고, 가까운 사람들을 모셔, 교회나 적절한 규모의 장소에서 고인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특별한 모임은 유가족들 마음을 다시금 위로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더불어 1주기가 되기 전 목회자는 이 시기를 기억하고 사별 가족에게 편지, 카드, 문자메시지를 통해 고인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음을 알리면서 도와 줄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미리 묻는 것도 중요하다. 이렇게 적어도 사별 이후 1년 동안은 목회자의 지속적인 돌봄이 중요하다. 사실, “장례 한번 잘 치루면 교회가 성장한다.”라는 말 가운데 목회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한 가지는, 바로 ‘지속적 사별 돌봄’에 관한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장례예배의 중요성은 인식하고 있지만, 사별한 가족들이 겪게 될 사별 슬픔의 과정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저 신앙심으로 극복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례의 절차가 끝나고 비탄의 과정이 지나 일상의 삶이 시작되면 사별자들의 마음은 더 혼란스럽다. 삶은 변한 것 없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은 아직 서야 할 곳을 찾지 못한 채 사그라지지 않는 슬픔과 씨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사람과의 만남을 회피하게 된다. 자신들의 마음을 깊이 알아주고 공감하지 못한 채 형식적인 위로를 건네는 사람들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하고, 심지어 상처받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시기에 목회자의 지속적인 관심과 돌봄은 사별한 교인이 애도의 과정을 잘 겪어 나아가 일상의 삶으로 회복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적어도 한 시간 이상 충분히 이야기를 들어 줄 시간을 가지고 전화나 방문을 통해 마음을 듣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예배를 비롯하여 소모임과 기타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격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한 연구에 의하면 신앙공동체와 목회자의 역할이 사별슬픔을 겪는 여성들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사별슬픔을 겪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질문 중, ‘사별의 슬픔을 극복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에 대한 문항에 응답자들은 ‘예배를 통한 치유와 회복’을 첫 번째로 들었다. 또한, 성경공부, 성경통독, 제자훈련 등 신앙공동체 안에서 제공해주는 프로그램을 통해 치유와 회복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러니 적절한 프로그램의 제공과 참여를 위한 격려가 필요하다.
의례를 통해 사별자들은 임계적인 공간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게 되는 거룩한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공동체가 함께 슬픔을 표현하며 서로 간에 연대감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자리이다. 단지 장례와 추모예배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주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 성경공부 모임, 소그룹 기도회, 홀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하고 위로의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은 어두운 광야를 걷는 시기에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재구성하도록 돕고 상실의 아픔과 고통을 잘 겪어 나아갈 소망과 힘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성경은 신앙공동체가 위로의 공동체임을 밝히고 있다. 고린도후서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모든 위로의 하나님”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은 바울이 겪은 모든 환난 가운데 위로자가 되어 주셨고, 그 받은 위로로서 환난 가운데 있는 모든 자들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고 고백한다. 기독교 영성의 핵심은 서로의 기쁨과 슬픔에 참여하는 영적 동반자로서 ‘신앙공동체’이다. 이 핵심을 담은 성경 구절이 로마서 12장 15절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mourn with those who mourn).” 여기서 “Mourn”은 애도한다는 표현이다. ‘애도하는 자들과 함께 애도하라’라는 것은 슬픔에 공감하고, 함께 눈물 흘리며, 경청하는 가운데 공감적 동반을 실천하라는 말이다.
이렇게 신앙공동체는 위로의 공동체로 부름 받았다. 신앙공동체가 안전한 위로의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바른 위로의 방법을 알아야 한다. 미성숙한 위로는 오히려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미성숙한 위로의 형태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형식적인 말을 전하는 경우이다. “힘내”, “괜찮아”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 상처가 되는 말도 있다. “다른 가족도 생각해야지” “고인도 네가 이러는 걸 원치 않을 거야.” “천국에서 하나님이 필요해서 데려간 거야.” 등 하나님의 뜻을 말하려는 경우도 있다. 상실에 대한 의미는 사별자 자신이 부여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다.
좋은 위로의 방법은 서두르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해결해주려는 마음에서 벗어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존중해 주는 것이다. 곁에서 함께 머물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는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알렌 울펠트(Alan Wolflet)은 애도상담에 있어 중요한 원리를 “동반”이라고 말한다. 동반을 위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 겪는 슬픔의 현장에 함께 있으면서 “공감적 증인”이 되라고 한다. 공감은 사별자의 마음에 감정을 이입하거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별자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경청하려는 태도이다.
사별의 아픔 가운데 함께 머물수 있는 동반자가 필요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좋다. 장례의 모든 과정이 끝나고 삶으로 복귀한 가족들에게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슬픔치유를 위한 세미나 제공, 예배와 소모임 참석을 위한 격려, 1주기 추모를 위한 예배 제공, 애도기간 혹은 1주기가 되기 전에 카드나 문자 보내기 등 사별자들의 안전한 애도 과정을 돕기 위한 노력이다. 이렇게 교회는 사별한 교인이 애도의 과정을 잘 겪어 나아갈 수 있도록 지지하는 안전한 치유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윤득형 박사는 감리교 목사로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죽음교육과 애도상담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웰다잉, 호스피스, 연명의료, 목회상담, 임상목회교육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감리교신학대학교 객원교수이다.
오천의 목사는 한인/아시아인 리더 자료를 담당하고 있는 연합감리교회 정회원 목사이다. [email protected]나 615) 742-5457로 연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