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교육, 말기 돌봄 & 목회 적용

사진: 브렛 캐배노, 언스플레쉬.
사진: 브렛 캐배노, 언스플레쉬.

인간이 살아가면서 맞이하는 위기 가운데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경험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실존으로 다가올 때 비로소 ‘나의 죽음’이 되고, 경험하는 순간 ‘나의 존재’는 이미 사라지기에 이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러기에 죽음 앞에 인간은 무력하고, 실제 죽음 앞에 선다는 것은 큰 충격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아무리 다양한 차원에서 준비했다 하더라도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갖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죽음을 부정하거나 회피하는 방식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제임스 프레이즈(James Frazer)는 “모든 종교의 역사는 죽음을 초월하기 위한 시도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대인들은 죽음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많은 문화권에서는 마지막 가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음이 임박한 사람들에게 일련의 마술적 주문을 수행했다. 이것을 “이집트 사자의 서”(The Egyptian Book of the Dead)라고 부른다. 그 주문들은 죽어가는 사람의 사후세계 여행길에서 만날 수 있는 숨어있는 방해물에 대한 경고, 악령 퇴치를 위한 기술들, 신들이 약속한 도움 등 실제적인 안내를 제공한다. 이와 유사한 것은 티베트 불교도들의 원전인 “바르도 퇴돌”(Bardo Thödol)이며, 일반적으로 “티베트 사자의 서”(The Tibetan Book of the Dead)라고 부른다. 티베트 불교도들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바르도 퇴돌”을 읽어주면서, 그들이 곧 경험하게 될 낯설고 새로운 이탈된 육체의 실재를 분명히 인식하면서, 물질적 세계에 남고자 하는 두려운 욕망에 저항하도록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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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인간 삶의 마지막 단계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누구나 맞이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자신이 미리 경험할 수 없기에 오로지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기 죽음을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가까운 가족과 친지의 죽음, 뉴스를 통해 들리는 대형사고 등은 죽음이 ‘나’의 삶 가운데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만든다. 흔히 장례식장에만 다녀와도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가까운 타인의 죽음은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죽음에는 크게 세 가지 진리가 있다. 첫째, 누구나 죽는다. 이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진리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백 년도 못살 인생 천년만년을 살 것처럼 살아간다. 그러다 막상 가족 혹은 나의 죽음이 현실 앞에 다가오게 될 때 당황하고 후회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둘째, 언제 죽을지 모른다. 태어남은 순서를 따르지만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 특별히 현대 사회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사건과 사고, 대형 참사가 끊이지 않는다. 그러니,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도 죽음과 관련된 또 다른 진리이다. 성경의 말씀처럼 사람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어도 누구나 죽고 종국에는 흙으로 돌아간다.

성경은 모든 인생의 시기마다 때가 있다고 말한다. 심을 때가 있으면 심은 것을 거둘 때가 있다. 자리에 오르면 내려와야 할 때도 있다.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다. 건강할 때도 있고 아플 때도 있다. 태어날 때가 있었으니 죽을 때도 있는 것이다. 필자가 미국에서 호스피스 인턴십을 할 때, 환자들에게 전도서 3장을 종종 읽어주었다. 어느 날 백인 여성 환자가 이 성경 구절을 듣고 본인에게 화를 내며 “난 죽지 않아”라고 말했다. 물론 이 환자는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이 환자는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죽음을 회피하고 싶었다.

산 자들이 축제라도 벌이듯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죽음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주제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죽음’이라고 언급하기를 꺼린다. 죽음 대신에 쓰이는 말은 다양하다. ‘떠났다’, ‘갔다’, ‘돌아갔다’, ‘사라졌다’, ‘운명하였다’ ‘영별하였다’ 등의 말이 그 예들이다. 한국에서는 숫자 ‘4’를 엘리베이터 층수에 표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죽을 사(死)’ 자와 음이 같기 때문이다. 일부 병원은 아예 4층이 없기도 하다. 또한, 죽은 사람의 물건을 사용하지 않고 태워버리는 관습은 죽은 자의 분노나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한 것이다. 이렇게 금기를 지키려는 인간의 노력은 죽음에 저항하는 것이 헛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경감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일상에서 죽음을 터부시하는 문화가 깊게 자리 잡게 되면 오히려 죽음을 준비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죽음과 마주쳐야 한다. 죽음과 관련된 진리가 말하는 것처럼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그러니 평소 죽음을 가까이하고, 성찰하고, 삶을 돌아보면서 남아있는 삶을 보다 의미 있게 살려는 노력은 삶의 지혜이다. 이것이 죽음 교육(Death Education)의 핵심이다.

임종과 말기 돌봄에 관하여서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연구 결과인 ‘죽어가는 환자의 다섯 단계’를 이해하고, 이에 따른 돌봄과 상담을 제공하는 것이 목회 적용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부정(Denial)의 단계에서 말기 진단받은 환자들은 대부분 그 사실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이렇게 부정하는 단계에서 누군가 “회복을 위해 기도한다” 혹은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한다”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환자는 말기 암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 있고 심지어 아프다고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시기에 중요한 것은 환자라고 구별하여 대하는 것보다 일상적인 대화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사람들은 말기 진단을 받은 사람들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피터슨(Cathy Peterson)은 남편이 말기 진단을 받은 것이 알려지자 사람들이 보인 첫 번째 반응은 회피였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말기 진단을 받은 초기, 부정의 단계에서는 일상적인 대화가 중요하다. 나아가, 병세가 궁금하다면 추측하지 말고 묻는 것이 필요하다. “어떻게 지내세요?” “좀 어떠세요?” “기도하고 있습니다” 등의 말은 그들의 상황이나 마음을 들을 좋은 기회를 마련해 준다. 물론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될 때는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저 지나치듯 인사치레로 묻는다면 환자나 가족은 상처받게 될 것이다. 아직 죽음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환자들은 몇 군데 병원에서 같은 진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충격에 빠지고 두 번째 단계인 분노(Anger)에 이르게 된다. 

분노의 대상은 의사, 간호사, 가족들, 그리고 자신이다. 사실 건강한 사람들만 봐도 화가 나는 시기이다. 나아가, 하나님께도 분노하는 마음을 갖는다. “하나님! 왜 나에게!”라고 소리친다. 신실하게 신앙 생활하며 성실한 삶을 살았던 사람일수록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크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마치 신앙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분노하는 환자를 보면서 “믿음이 약해졌다” “신앙이 없어졌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표출하는 환자를 향해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뭔가 뜻이 있을 것이다.”라고 답변해 주는 것은 어리석은 방법이다. 하나님을 향해 소리치며 울부짖는 “왜”라는 외침은 질문이 아니다. 지금까지 믿어왔던 신앙에 대한 도전을 받는 것으로, 이러한 물음에 답을 주려는 시도는 미성숙한 태도이다. 이 단계에서 환자는 분노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이때 돌봄은 존중과 존엄은 가치를 유지해야 하며, 마음으로 듣고,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세 번째 타협(Bargaining)의 단계에 들어서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환자는 하나님과의 타협을 시도한다. 생명 연장을 위한 타협으로, “저를 살려주시면…하겠습니다.”라고 말하거나, 기간 연장에 대한 타협으로, “딸이 결혼할 때까지만 살게 해주세요”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다. 이때는 환자를 위해 마음을 다해 함께 기도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목회자가 직접 가정이나 병원을 방문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골서치(Nancy J. Gorsuch)는 목회에서 분명한 목적을 지닌 방문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다. 다양한 문제로 위기를 겪고 있는 교인들을 방문하여 대화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듣는 것은 신앙의 성숙을 도모할 기회라 말한다. 특별히, 환자가 있는 가정, 병원, 요양원을 방문하는 것은 목회자의 분명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한다. 현대사회에서 가정을 방문하는 것을 꺼리는 교인들도 있지만,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는 목회자가 어려움의 현장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네 번째 단계인 우울(Depression) 상태에 이른다면 방문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이때는 스스로 자기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할 시간이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귀찮을 수 있고, 만일 치료를 받는 중이라면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 수 있고, 말하는 것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 이제 우울의 단계를 지나 죽음을 수용(Acceptance)하는 다섯 번째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때는 죽음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생각하고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환자가 원한다면 방문을 통해 영적 지지를 해주는 것이 좋다. 또한, 이때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숨김없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퀴블러 로스는 수용의 단계에서는 목회자가 자주 방문하여 신앙의 자산을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특별히, 이때는 가족, 친지, 친구들과 감사, 사랑, 화해, 용서를 나눌 좋은 기회이다. 목회상담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화해(reconciliation)를 통한 회복이다. 목회자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적극적인 표현을 격려할 수 있다.

이렇듯 각 단계의 특징을 잘 이해하면서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클라인벨(Howard Clinebell)은 성장상담(Growth counseling) 이론을 제시했다. 성장상담은 인생의 각 단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지속적인 발달모델이며, 인간의 통합(wholeness)을 이루기 위한 모든 변화의 과정을 포함한다. 죽음도 삶의 일부이기에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성장한다. 이 성장의 마지막 단계에서 삶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화해와 회복으로 이끌어 준다면 삶의 완성과 통합을 이루도록 도울 수 있다.

미국 병원과 호스피스에서 채플린으로 활동한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위기의 순간에 함께 있어 준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지지해주고, 기도해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가까이 있다는 것은 환자와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된다. 호스피스에게서는 더욱 그러하다. 죽어가는 환자들과 대화하고, 성경을 읽어주며, 기도해 줄 수 있는 영적 동반자가 있다는 사실은 환자들의 마지막 여정을 더욱 편안하게 해준다. 또한 환자의 가족들은 예상되는 죽음(anticipatory death) 앞에서, 미리 사별애도(anticipatory grief)를 경험하게 된다. 너무 길어진 병수발로 몸과 마음이 지친 가족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도 중요하다. 이렇듯 죽음과 슬픔의 현장에 함께 있어 주는 것은 가장 큰 위로의 방법이다. 

2. 장례 - 치유와 위로

3. 상실과 애도, 장례 후 슬픔 치유 목회

윤득형 박사는 감리교 목사로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죽음교육과 애도상담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웰다잉, 호스피스, 연명의료, 목회상담, 임상목회교육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감리교신학대학교 객원교수이다.

오천의 목사는 한인/아시아인 리더 자료를 담당하고 있는 연합감리교회 정회원 목사이다. [email protected]나 615) 742-5457로 연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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