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이 시작된 지도 한 달 이상이 지났다. 이때 즈음이면 으레 한 해를 시작하며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세웠던 신년 각오들이 혹여 작심삼일로 그치진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인류에게 공통으로 약속된 시간 개념인 ‘월력(月曆)’이 있기 때문이다. 한 장씩 달력을 넘기며 정해진 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보편적 시간 개념은 이미 수 세기에 걸쳐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우리만의 신비하고도 은밀한 시간 기준이 존재한다. 바로 교회의 달력인 ‘교회력(敎會曆)’이다.

교회력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분의 생애 주기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함께 삶을 살아내고자 했던 거룩한 노력의 산물이다. 동시에, 그러한 열심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신 은총의 선물이기도 하다. 부활하신 후 이 땅에 머무시다가 승천하신 주님의 ‘다시 오겠다!’ 하신 약속을 가슴 깊이 간직했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 재회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마라나타(Maranatha)!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신앙고백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당대 로마의 거센 외압과 핍박 속에서도 그들이 꿋꿋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재림을 향한 종말론적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연한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 세월이 하루, 이틀, 조금씩 늘어날수록 그리스도인들의 기억 역시 희미해지고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했던 추억, 미래에 대한 약속의 말씀, 그리고 소망으로 가득 찼던 자신들의 첫 마음까지 모두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초대 교회부터 계승되던 신앙의 유산이 점차 희미해짐을 깨달은 교회는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 예수님이 행하셨던 일들과 그분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그분이 약속하신 소망을 언제나 기억하며 살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교회력을 만들어 지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서서히 정립해나간 시간 개념은 오늘날 기독 교회가 공통으로 지키는 큰 흐름에서의 교회력을 정착시켰다.
이처럼 교회력은 초대 교회 시대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단 일분일초도 우리 주님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 또한 온전히 주님의 시간으로 나 자신의 물리적 시간을 채워가기 위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동행하려 했던 거룩한 노력의 열매라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이러한 교회력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교회 안에 적용하여 예배를 더욱 새롭고 풍성하게 채우려는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다. 그 구체적인 시도와, 그로 인한 유익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째로, 교회력에 기초한 예배는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적 콘텐츠로서 하나의 유기적 흐름을 갖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교회력이 그리스도의 생애 주기에 기초한 내용으로서, 이를 바탕으로 한 예배의 모든 세부적 순서는 자연스레 그리스도 중심(Christ-centered)이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성경 봉독의 경우, 기본적으로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lectionary)’의 내용에 따라 구약/시편/서신/복음의 말씀이 고르게 하나의 예배 가운데 읽게 된다. 모든 성도가 성경의 여러 말씀을 편식하지 않고 두루 건강히 접하는 (신앙의) 균형감, 혼자가 아닌 공동체가 함께 말씀을 읽을 때 경험되는 신앙적 연대감과 유대감, 개역 개정을 비롯한 여러 성경 번역 버전을 통해 체험하는 언어적 표현의 다양성과 아름다움, 각각의 본문이 이야기하는 내용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며 말씀으로 풀어질지를 고민하는 가운데 스스로 다져가는 영적 근육, 그리고 이를 종합하는 설교자 개인에게 있어서도 자신이 원하는 주제를 임의로 선택하여 전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본문들이 어떻게 서로 만나 해석되고, 더 나아가 말씀이 어떻게 지금의 시대적 상황을 읽어갈 것인지에 대한 설교 훈련 등등이 가능하다. 이처럼 성서일과를 비롯해 교회력을 담아내는 여러 요소가 예배를 구성하는 찬양, 설교, 기도 등 각각의 순서 안에 조화롭게 담길 때, 그 예배는 시작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내러티브를 일관되게 전달한다. 그리고 회중은 유기적 흐름의 예배를 통해 깨달은 단일한 메시지와 다양한 은혜를 더 오랜 시간 간직할 수 있다. 즉, 예배 후 펼쳐지는 일상의 시간 속에서도 교회력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시간을 예수님과 더불어 힘있게 살아갈 동력을 얻게 된다.
둘째로, 다채로운 감각의 예배를 통해 다양한 은혜를 맛볼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감(五感)이 예배 안에서 얼마나 살아날 수 있을지에 대한 이슈는 일찍이 서구를 중심으로 예배 갱신의 움직임을 통해 촉발된 중요한 이슈 중 하나다. 단순히 오랜 시간 앉아서 설교를 귀로 듣는 것에만 익숙한 예배에서, 주님을 보고-듣고-만지고-먹으며 시시각각 다양한 형태의 은혜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경험할 기회를 교회력은 제공한다. 단적인 예로 각 절기를 대표하는 색깔과 상징을 통한 시각적 감각의 활용이 가장 큰 특징이다. 기본적으로 ‘보라색-흰색-초록색-빨간색’이 각각 상징하는 ‘경건-기쁨-성장-성령’의 정신이, 이에 해당하는 절기 즉, ‘대강절과 사순절(보라색)-성탄절과 부활절(흰색)-주현절과 성령강림절 후(초록색)-성령강림절(빨간색)’에 맞추어 등장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할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땅의 물리적 시간을 뚫고 들어와 우리와 함께 머무시며, 우리의 시간을 다스리고 계심을 공감각적으로 경험한다. 또한 예배 가운데 각각의 절기를 드러내는 ‘초(대강절)-별(성탄절)-세례의 물(주현절)-십자가(사순절)-백합(부활절)-불과 비둘기(성령강림절)’ 등의 상징 활용을 통해서는 남녀노소, 동서고금을 초월하여 모든 성도가 보다 직관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시간 속에 깃든 은혜의 흔적을 발견해갈 수 있게 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성도가 이러한 예수님의 시간 속에 들어와 살아가는 공통의 인식을 가질 때, 그 공동체는 같은 영성을 바탕으로 개인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도 동일한 한 성령의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배는 상징적인 감각을 통해 압축된 하나의 신비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언제 드렸을지 모를 예배의 사진 한 장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 시간을 추적할 수 있으며, 그 시간 속에 역사하셨던 은혜를 더듬어갈 수 있는 것이 바로 교회력을 통한 감각이 갖는 힘이다.
QR 코드

디자인은 한국컴패션의 최현정 디자이너, 컨텐츠는 감리교신학대학교 나눔의 예전학회 표이삭 학회장이 담당했다.
마지막 셋째로, 이러한 교회력이 매년 지속적이고 연속적으로 반복되면서 교회는 더욱 성숙과 일치의 열매를 맺어간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가 말했던 것처럼 끝없는 ‘성화(sanctification)’의 여정을 통해 작은 예수로 성숙해가야 하는데, 교회력은 그 과정 가운데 가장 안전하고 건강한 자양분을 공급한다. 이천여 년의 기독 역사 속에서 충분히 검증된 교회력을 중심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적으로 몸 된 교회가 살아갈 시간의 굴레는, 흥미를 끄는 행사나 새로운 대안을 거듭하는 프로그램으로 채워져서는 안 된다. 도리어 교회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은 생명의 떡, 생명수인 예수 그리스도로 온전히 채워졌을 때 비로소 해를 거듭하며 더욱 짙어지기도 하고 깊어지기도 하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그리스도로 점철된 시간의 개념 안에서 한 몸을 이룬 공동체가 같은 시간을 예배로 살아낼 때, 비로소 세대가 통합되고 가정이 하나 되며 모두와 더불어 연합하는 조화와 일치의 성숙을 결실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회의 모든 세대가 모여 함께 교회력에 따라 각 절기의 의미를 배우고 경험하는 활동들을 개최할 수도 있다. 대강절 초 함께 만들기, 부활절 계란 그리기 등이 그 예이다. 특별히 필자가 지도교수로 있는 감리교신학대학교 나눔의 예전학회는 2022 다음세대 절기 예배 페스티발에 참여해 “절기 예배 체험전”을 기획했다. 대강절을 시작으로 내부 공간을 참여자들이 교회력의 시간을 순차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내러티브를 일종의 갤러리처럼 구성했다. 한가운데에는 이 시간의 여정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신학적 의미로써 성찬 테이블을 두었다. 아울러 각 절기와 관련된 설명, 음악, 색깔, 성경 구절 등의 내용은 QR코드를 통해 각 교회의 상황에 맞게 다양하게 활용하도록 공유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말씀, 이적, 죽음, 부활 그리고 다시 오심을 기억하며 살아가기 위한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는 삶의 달력인 교회력을 통해서, 성령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 안에 들어가 모든 교회와 성도가 함께 예배할 수 있다.
오석진 교수는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 예배학을 가르치고 있다.
오천의 목사는 한인/아시아인 리더 자료를 담당하고 있는 연합감리교회 정회원 목사이다. [email protected]나 615) 742-5457로 연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