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의식이다. ‘세례(baptism)’라는 말 자체가 ‘물에 담그다’라는 뜻의 'baptisma'에서 비롯되었기에 물로 행하는 의식을 뜻하는데, 이는 기독교에 입회하는 전체 과정의 출발을 일컫는 말(Initiation)이다. 즉, 기독교의 시작과 함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 된 교회를 형성 및 유지해 온 소중한 의식이 세례이다. 일찍이 종교개혁자 칼빈(Calvin)은 하나님의 주관적인 선택의 결과를 강조하면서 “세례는 하나님에 의하여 그의 자녀로 삼으시는 거룩한 인침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접붙임(Engrafted in Christ)으로서 새로운 출발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세례는 절대주권의 표시로서 하나님과 인간이 맺는 계약의 인침(seal)이다.

일찍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또는 거룩한 예전에 참여할 때 반드시 물로 깨끗이 씻었던 ‘정결예식’에서 비롯된 세례는 레위기 16:24, 에스겔 36:25-27, 말라기 3:1-3 등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그 후 시대가 지나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오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서 받아들여졌던 세례의 모습은 쿰란공동체와 유대교 개종자들의 행적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적인 세례 이해는 세례 요한에 의해 비로소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요한은 적극적인 회개운동과 더불어 단순한 유대교적 의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의미로서의 세례 이해를 통해 궁극적으로 세례가 성례전으로 고백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마가복음 10:38과 누가복음 12:49-50에서 자신이 통과하게 될 십자가 사건을 세례에 빗대어 미리 말씀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부활 사건 이후 승천하시면서 우리 모두에게 부탁하신 소위 ‘지상대명령’(마태복음 28:18-20)에서도 복음 전파와 더불어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야 함을 교회의 의무로 선언하셨다.
이러한 성서적 배경과 그 이해를 바탕으로 초대교회는 일찍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세례 예식의 기본적 구조를 완성했다. 초대교회에서는 무려 3년에 걸친 세례후보자들의 철저한 훈련 및 교육 과정은 당대 로마의 박해와 외압 가운데서도 초대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새로운 존재로의 거듭남과 새로운 세계(공동체)로의 진입을 갈망했는지 가늠케 한다. 그러한 여정의 끝에서 그들은 결국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고, 마침내 부활 전야 예배에서 세례예식과 함께 첫 성찬에 참여하는 감격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순간의 감격은 개인의 기쁨을 뛰어넘어 교회 공동체 전체의 경사로 받아들여졌다. 그도 그럴 것이, 세례 후보자로서 고행에 가까운 오랜 훈련 과정 동안 당사자들이 포기하고 싶던 그 순간에도 끝까지 그들을 붙잡아 준 버팀목이 있었으니, 바로 ‘교회’였기 때문이다. 3년을 하루 같이 예비 후보자들의 이름을 항상 불러가며 그들을 위해 전심으로 중보기도하고, 또한 지극한 사랑으로 그들을 품은 채 언제나 신앙 안에서 권면하며 동고동락을 함께 했던 존재가 교회 공동체였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의 감격은 더 이상 남의 것만도, 또 어느 특정 개인의 것만도 결코 될 수 없었다. 도리어 교회 전체의 기쁨, 교회 전체의 경사이자 간증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례만큼 강력한 공동체적 행위는 또 없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의 세례를 돌이켜보자. 최근 목사님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반 농담처럼 자주 거론되는 얘기가 있다고 한다. “세례식 좀 해봤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그만큼 새롭게 전도되어 교회에 유입되는 인구가 크게 줄었고, 사회 전반적인 인구 감소도 이러한 현상을 부축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과거에 교회가 한창 부흥하던 시기에도 세례예식은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실제 예배 현장에서, 또한 교회 전체적으로 비중 있게 인식되거나 다루어지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올해 우리 교회에서 세례 받을 예비 후보자들이 몇 명인지, 그리고 그들의 이름과 개인적인 상황이 어떠한지, 이를 해당 교회의 교인들 전체가 파악하고 있는지, 그들(세례후보자)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는지, 그들을 위해 어떠한 신앙교육과 훈련의 과정이 체계적으로 준비되어 있는지, 그것들이 활발히 실행되고 있는지- 이러한 진지한 물음을 기준으로 반추해 볼 때, 오늘날 우리의 세례를 다시 한번 성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동안 세례가 마치 세례 받는 사람만의 매우 사적인 행사처럼 이해하고 통용되어 왔다면, 이를 보다 공동체적인 이해로 확대하여 개편할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의 정신에서 알 수 있듯이 세례는 한 영혼이 구원받고 거듭나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로서 새로운 공동체, 즉 교회로 진입하게 되는 ‘영적 생일’과도 같은 사건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 영혼의 새 출발의 증인이자 중보자로 세워진다. 따라서 지난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세례를 ‘교회의 공동체적 출산 행위’로 고백하기도 했던 것이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받거나 천국행 열차티켓을 발급받은 것처럼 신앙의 여정이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부터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성화의 여정으로 함께 걸어가야 함을 교회가 알려주고 동행해야 한다. 지속적인 관심과 기도 가운데 서로를 끌어주고 밀어주며, 끝까지 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도록 지체된 자들이 함께 도와야 한다. 그렇게 말씀을 따라 하나 됨을 힘써 지키며 서로가 서로를 뜨겁게 사랑할 때, 비로소 세상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줄 알게 되리라 말씀으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개인의 일생에 있어서 단 한 차례의 사건인 세례예식이 이토록 중요한 공동체적 예식이자 거룩한 성례전이라면, 오늘날 우리 교회와 예배 안에서 이 세례가 어떻게 새롭게, 어떻게 공동체적으로 경험될 수 있을까?
몇 해 전 필자는 서울에 있는 한 교회의 중고등부와 청년부 하계수련회 강사로 초대된 적이 있었다. 강원도에 위치한 넓은 수영장이 있는 펜션을 빌려서 진행된 수련회의 마지막 폐회예배가 꽤 인상적이었다. 전통적으로 매년 그 교회의 중고청 하계수련회 폐회예배에서는 전교인을 대상으로 일 년에 한 번 있는 세례예식이 거행된다고 했다. 따라서 모든 교인이 수련회 마지막 날 수련회 장소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어떤 해에는 수영장에서, 또 어떤 해에는 계곡이나 바다에서 폐회예배를 드리며 세례식도 같이 진행했다. 전교인이 물속에서 커다란 원을 그려 주위에 둘러있고, 담임목사와 부교역자가 성의를 입은 채 가운데 서 있으면 세례를 받는 이들이 흰 성의를 입고 차례대로 입장하여 세 차례 침례를 받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세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세례 받는 수세자의 주위를 둘러싼 모든 성도들이 함께 찬양을 불렀는데, 세례(침례)를 받고 한 사람씩 물에서 올라올 때마다 뜨거운 환호와 박수갈채를 그들에게 보냈다. 어떤 이들은 벅찬 감격에 눈물을 훔치기도 했고, 또 성도들끼리 서로 포옹하면서 그들의 구원을 기뻐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축제의 장이자 감사와 환희가 넘치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에 와중에 문득 한 생각이 나의 마음을 두들겼다. ‘그래, 교회에서 가장 크게 울려 퍼져야 할 소리가 있다면 바로 이렇게 구원에 이르는 소리지! 그 구원으로 인하여 모두가 기뻐하고, 또 감사하면서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소리가 터져 나와야 하는거지!’ 이전해 가을 즈음부터 예비 세례 후보자로 지명된 이들을 1년 여 시간 동안 함께 품고 기도해 온 교회의 모든 지체들에게 그토록 소망했던 그들의 세례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기도 응답이기도 했다. 이처럼 모든 공동체원들이 함께 자신의 영적 경험으로 고백하는 ‘우리 교회 세례식’이야말로 세례에 대한 가장 성서적이면서도 신학적인, 그리고 초대교회적인 개념의 동시대적인 건강한 적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이러한 세례가 한 개인에게 있어 일생에 단 한 번 밖에 허락되지 않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이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임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정글 같은 세상을 전쟁하듯 살아가는 우리는 날마다 죄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고 있고, 게다가 바쁘다는 핑계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너무나 쉽게 간과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게는 교회의 예배당 입구마다 세례반(baptismal font)을 배치하여성도들이 드나드는 모든 순간마다 그 속의 성수(成水)로 십자가를 그리며 자신이 세례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물을 만하면서 자신이 씻음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물의 따뜻한 온도 속에서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 물을 신체나 머리에 바르면서 잠자던 나의 영혼을 다시금 깨우는- 이러한 일련의 감각을 통한 세례의 기억 소환 및 영적 각성은 성도들의 신앙에 큰 유익이 된다. 더 나아가 예배의 세팅 안에서 자신의 세례를 다시 확증하며 언약을 갱신하는 예식을 진행할 수도 있다. <세례재확증예배>, <세례언약갱신예배> 등으로 불리는 이러한 예배는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시행되고 있다.
- 연합감리교회에서는 매년 1월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주일을 주의 세례 주일로 지키고 있으며, 세례언약갱신 예배 예식서를 통해서 자신의 세례를 기억하고 세례 언약대로 살아가고자 다짐하는 시간을 가진다.
- 필자가 지도교수로 있는 감리교신학대학교 나눔의 예전학회가 기획 및 진행했던 세례언약갱신 예배 자료를 소개한다. 첫 번째는 지난 <2019 예배콘퍼런스>에서 여는 예배였던 “오라, 생명의 물가로!”라는 예배이고, 두 번째는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절에 온라인으로 진행했던 <2021 예배콘퍼런스>의 온라인 성례예배 “WORSHIP_on_the_LINE”이다. 각 교회의 사정에 맞게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개인의 신앙의 고백 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신앙의 자녀로 키우겠다는 공동체의 고백인 세례의 참된 의미를 알고 매년 세례언약갱신 예배를 통해 자신이 받은 세례의 의미를 되새기며 모든 교회가 성화의 길을 함께 걷기 바란다.
오석진 교수는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 예배학을 가르치고 있다.
오천의 목사는 한인/아시아인 리더 자료를 담당하고 있는 연합감리교회 정회원 목사이다. [email protected]나 615) 742-5457로 연락할 수 있다.